압둘 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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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압둘 일라는 헤자즈의 알리 이븐 후세인 왕의 아들이자 이라크 국왕 페살 1세의 형제였다. 그는 가지 왕의 사망 이후 미성년 페살 2세를 대신하여 이라크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섭정으로서 친영·친미 정책을 추진하며 연합국을 지원했고, 1941년 쿠데타로 잠시 섭정직에서 물러났으나 복귀 후 연합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온건한 민족주의 정책을 펼쳤다. 1953년 페살 2세가 성년이 되면서 섭정직에서 물러났지만, 이후에도 국왕의 고문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58년 7월 14일 혁명으로 이라크 왕정이 무너질 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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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 일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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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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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이라크 왕국의 섭정 |
재임 시작 | 1939년 4월 4일 |
재임 종료 | 1941년 4월 1일 |
군주 | 파이살 2세 |
칭호 2 | 이라크 왕국의 섭정 |
재임 시작 2 | 1941년 6월 1일 |
재임 종료 2 | 1953년 5월 2일 |
군주 2 | 파이살 2세 |
칭호 3 | 헤자즈 왕세자 |
재임 시작 3 | 1924년 10월 3일 |
재임 종료 3 | 1925년 12월 19일 |
군주 3 | 알리 빈 후세인 1세 |
전임자 3 | 알리 빈 후세인 |
칭호 4 | 이라크 왕세자 |
재임 시작 4 | 1943년 11월 10일 |
재임 종료 4 | 1958년 7월 14일 |
군주 4 | 파이살 2세 |
전임자 4 | 파이살 2세 |
출생일 | 1913년 11월 14일 |
출생지 | 오스만 제국 헤자즈 빌라예트 타이프 |
사망일 | 1958년 7월 14일 (44세) |
사망지 | 아랍 연방 바그다드 |
종교 | 수니 이슬람 |
로마자 표기 | 'Abd al-Ilah bin Ali al-Hashimi |
가문 | |
왕가 | 하심가 |
아버지 | 알리 빈 후세인 |
어머니 | 나피사 카눔 |
배우자 | 멜렉 카눔 파이자 카눔 히얌 압둘라 |
훈장 |
2. 생애
압둘 일라는 헤자즈의 알리 이븐 후세인 왕의 아들이자 상속자였으며, 이라크의 페살 1세 왕의 형이자 알리야 빈트 알리의 형제였다. 그의 가족은 네즈드의 이븐 사우드가 아버지의 권력을 찬탈했을 때 헤자즈에서 도망쳤다.[2] 가지 왕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자, 압둘 일라는 미성년 페살 2세 왕을 위해 이라크에서 섭정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2]
제2차 세계 대전 중, 압둘 일라는 1941년 이라크 쿠데타로 인해 잠시 권좌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 쿠데타는 전 총리 라시드 알리 알가일라니가 주도했는데, 그는 압둘 일라의 친영국 정부에 대항하여 나치 독일을 지지했다. 압둘 일라는 목숨이 위험하다고 느껴 이라크를 탈출했고, 그의 섭정 자리는 파이살 2세의 나이 많은 종교적 친척인 샤라프 빈 라제가 대신했다.[4] 압둘 일라는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관을 거쳐 하바니야의 RAF 기지로 이동한 후, 영국 군함 HMS 칵체이퍼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피신했다.[3] 이후 그는 전 총리 누리 알사이드와 함께 암만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삼촌인 요르단의 압둘라 1세의 손님으로 지냈다.[4]
1941년 5월 2일, 영국은 이라크 반군에 대한 영국-이라크 전쟁 공세를 시작했다. 5월 26일, 뉴욕 타임스는 압둘 일라가 반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부족 및 종교 지도자들의 봉기를 촉구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이 "힘든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이라크 국민, 군대, 경찰에게 특별히 호소했다. 6월 2일까지 라시드 알리의 "국가 방위 정부"는 붕괴되었고, 라시드 알리는 이란으로 도망쳤다. 압둘 일라는 바그다드로 돌아와 섭정으로 복직되었다.[5] 이후 누리 알사이드와 함께 연합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온건한 민족주의적 접근 방식을 추구했다.[2]
1942년, 웬델 윌키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영국과 중동을 여행했고, 이라크에서 압둘 일라는 윌키가 참석한 성대한 국빈 만찬을 열었다.[6] 1945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새 미국 영부인 베스 트루먼이 주최한 첫 번째 국빈 만찬의 귀빈으로 초대받았다.[7] 또한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공훈 훈장을 받았다.[8]
1953년, 압둘 일라는 페살 2세가 성년이 되면서 섭정에서 물러났지만, 젊은 국왕의 측근 고문이자 친서방 외교 정책의 지지자로 남았다. 1955년, 이라크는 바그다드 조약기구(중앙 조약 기구, CENTO라고도 함)를 채택했다. 1957년 5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국왕은 8일간 이라크를 방문하여 파이살 2세, 압둘 일라, 그리고 총리 누리 알사이드의 영접을 받았다.
1958년 7월 14일, 압둘 카림 카심 준장이 이끄는 쿠데타로 인해 이라크 왕정이 무너졌다. 이 쿠데타로 압둘 일라는 왕족 대부분과 함께 알리하브 궁전에서 살해되었다. 왕세자 압둘 일라의 시신은 알라시드 거리에 질질 끌려다녔고 토막났다. 타임 잡지에 따르면, 감마르 압델 나세르의 중동 뉴스 에이전시는 "인민들은 압둘 일라의 시신을 개처럼 거리로 끌어다 팔다리를 찢었다"라고 보도했다. 그 후 군중들은 시신을 불태워 국방부 문에 매달았다.[10][11]
압둘 일라가 보유했던 계급은 다음과 같다.
그는 1945년 6월 1일 공훈 훈장(최고 사령관)을 수여받았다.
- 폴란드(망명 정부): 백수리 훈장, 1947년.
2. 1. 초기 생애와 헤자즈 왕국
عبد الإله|압둘 일라ar는 헤자즈의 알리 이븐 후세인 왕의 아들이자 이라크의 페살 1세 왕의 조카였다. 네즈드의 이븐 사우드가 알리 이븐 후세인의 권력을 찬탈했을 때, 압둘 일라의 가족은 헤자즈에서 망명길에 올랐다.[2]압둘 일라는 헤자즈 왕 알리 이븐 후세인(이라크 국왕 파이살 1세의 형)의 아들로 태어나, 헤자즈 왕국의 왕위 계승자였다. 그러나 나즈드 출신의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후일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에 의해 아버지가 헤자즈를 빼앗겼기 때문에, 압둘 일라의 일족은 헤자즈를 떠났다.[16]
2. 2. 이라크 섭정 (1939년 ~ 1953년)
1939년 가지 국왕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자, 압둘 일라는 어린 파이살 2세의 섭정으로 이라크의 실권을 장악했다.[2]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 라시드 알리 알가일라니의 친독일 쿠데타로 인해 잠시 섭정직에서 물러났으나,[4] 영국군의 지원으로 복귀했다.[5] 섭정 기간 동안 압둘 일라는 누리 알사이드 총리와 협력하여 친영, 친미 정책을 추진하며 연합국을 지원했다.[2]1941년 5월 2일, 영국은 이라크의 친독일 세력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개시하였다. 6월 2일, 라시드 알리의 "국가 방위 정부"는 붕괴되었고, 라시드 알리는 페르시아로 망명하였다. 압둘 일라는 바그다드로 돌아와 섭정으로 복직되었다.[18]
1942년, 웬델 윌키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영국과 중동을 방문했다. 이라크에서 압둘 일라는 윌키를 위해 성대한 국빈 만찬을 열었다.[19]
1945년, 압둘 일라는 미국을 방문했다. 그는 베스 트루먼이 주최한 첫 번째 국빈 만찬의 귀빈이었으며,[20]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공훈 훈장을 수여받는 등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했다.[21]
1953년 파이살 2세가 성년이 되면서 섭정직에서 물러났지만, 이후에도 국왕의 고문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55년, 이라크는 바그다드 조약기구(중앙 조약 기구, CENTO라고도 함)를 채택했다. 다른 회원국은 이란(팔레비 왕조), 파키스탄, 터키 그리고 영국이었다. 본부는 처음에 바그다드에 있었다.
1957년 5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국왕은 8일간 이라크를 방문했다. 그는 파이살 2세, 압둘 일라, 그리고 누리 알사이드 총리의 영접을 받았다. 이것은 사우디 국왕의 이라크 최초 방문이었으며, 이라크의 아랍 연방 가입과 감마르 압델 나세르의 아랍 연합 공화국과의 단절을 기념했다.[9]
2. 3. 친서방 외교와 중동 정세
압둘 일라는 1953년 파이살 2세가 성년이 되어 섭정에서 물러난 후에도 고문으로서 서방 국가 편향적인 외교 정책을 계속 주창했다.[2]1955년, 이라크는 바그다드 조약을 승인하여 중동 조약 기구(METO, 후에 CENTO로 개칭)가 결성되었다. 이 조약에는 이라크 외에도 이란, 파키스탄, 터키, 영국이 참여했다. 바그다드에 본부를 둔 이 기구는 냉전 시기 소련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친서방 동맹이었다.[22]
1957년 5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븐 사우드 국왕이 이라크를 방문했다. 파이살 2세 국왕과 누리 알사이드 총리가 사우드 국왕을 맞이했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첫 이라크 방문이었다. 이 방문은 이집트와 시리아가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의 주도로 결성한 아랍 연합 공화국에 대항하여, 이라크와 요르단이 결성한 아랍 연방을 축하하고, 아랍 군주국 간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22]
1957년 11월, 압둘 일라는 일본을 국빈 방문했다.[23]
2. 4. 7월 14일 혁명과 최후
1958년 7월 14일, 압둘 카림 카심 준장이 주도한 쿠데타로 이라크 왕정이 무너졌다. 이 쿠데타로 압둘 일라는 왕족 대부분과 함께 알리하브 궁전에서 살해되었다.[10][11] 그의 시신은 알라시드 거리에 질질 끌려다녔고 토막났다. 타임 7월 21일자 보도에 따르면, 감마르 압델 나세르의 중동 뉴스 에이전시는 "인민들은 압둘 일라의 시신을 개처럼 거리로 끌어다 팔다리를 찢었다."라고 보도했다. 그 후 군중들은 시신을 불태워 국방부 문에 매달았다.[10][11]
3. 논란과 비판
압둘 일라는 재임 기간 동안 친서방, 특히 친영국 정책을 펼쳐 이라크 국내 민족주의 세력으로부터 외세에 의존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라크 민중들은 그를 영국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고, 이는 7.14 혁명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1년 쿠데타로 인해 잠시 권좌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며, 복귀 후에는 연합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온건한 민족주의적 접근 방식을 추구했다.[5]
4. 사생활
마이클 블로흐(Michael Bloch)는 자신의 저서에서 압둘 일라가 동성애자였으며, 영국 정치인 앨런 렌녹스-보이드와 친밀한 관계였다고 주장했다.[12] 블로흐는 압둘 일라가 사망한 후, 혁명가들이 왕자의 서류에서 렌녹스-보이드의 친밀한 편지를 발견하여 세계 언론에 공개했다고 언급했다.[12]
1950년대 초, 압둘 일라는 터키 외교관에게 터키 라키의 한 브랜드인 클럽 라키를 매우 좋아한다고 말했다.[13]
5. 계급 및 서훈
계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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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
6. 하심 가계도
참조
[1]
뉴스
IRAQ – Resurgence in the Shiite World – Part 8 – Jordan & The Hashemite Factors
https://archive.toda[...]
2014-03-28
[2]
백과사전
'Abd al-I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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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yclopædia Britannica, Inc.
[3]
서적
Iraq 1941: The Battles of Basra, Habbaniya, Fallujah and Baghdad
Osprey Publishing
[4]
잡지
Trouble in Paradise
https://web.archive.[...]
1941-04-21
[5]
서적
Iraq 1941: The Battles for Basra, Habbaniya, Fallujah and Baghdad
Osprey Publishing
[6]
잡지
Points East
https://web.archive.[...]
1942-09-28
[7]
잡지
Family at Home
https://web.archive.[...]
1945-06-04
[8]
잡지
Talk & Ceremony
https://web.archive.[...]
1945-06-11
[9]
잡지
Gathering of Kings
https://web.archive.[...]
1957-05-25
[10]
잡지
Revolt in Baghdad
https://web.archive.[...]
1958-07-21
[11]
서적
Saddam Hussein: a political biography
Grove Press
[12]
서적
Closet Queens
Little, Brown
[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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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oi.org/10.1[...]
Cambridge University Press
[1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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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I.B.Tauris
1998-12-15
[15]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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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lhussein[...]
201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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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Abd al-I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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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뉴스
Trouble in Paradise
http://www.time.com/[...]
1941-04-21
[1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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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뉴스
Points East
http://www.time.com/[...]
1942-09-28
[20]
뉴스
Family at Home
http://www.time.com/[...]
1945-06-04
[21]
뉴스
Talk & Ceremony
http://www.time.com/[...]
1945-06-11
[22]
뉴스
Gathering of Kings
http://www.time.com/[...]
1957-05-25
[23]
웹사이트
국賓・公賓など外国賓客(元首・王族)一覧表(昭和27年~昭和63年) - 宮内庁
https://www.kunaicho[...]
[24]
뉴스
Revolt in Baghdad
http://www.time.com/[...]
1958-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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